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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9A). 주의 집을 위한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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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9A). 주의 집을 위한 열심

시편 69:1-18, 베드로전서 2:19-21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10-07

말씀내용
1. 특징과 구조 (5, 35)
시편 69편은 시편 22편과 110편 다음으로 신약성경에서 많이 인용된 시편입니다. 모두 36절 가운데 일곱 절이 신약 성경에 인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편을 읽으시면서, 그것을 인식하셨습니까? 신약의 인용구절들은 주님께서 직접 인용하셨거나 주님에 관한 인용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시편이 메시아 시편으로 분류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논란도 있습니다. 5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우매함과 죄를 고백한 것은 그리스도께 결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이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또 하나 이 시편이 표제어에 있는 대로 다윗의 시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이유는 35절의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라는 표현 때문인데, 이것은 유다의 멸망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앗수르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후에 히스기야가 썼거나, 예루살렘 멸망 후에 예레미야가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였던 다윗이 성령의 영감으로 썼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 시편 69편은 한 마디로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존 스텍(John H. Stek)이 한 문장으로 이 시편을 잘 정리한 말이 있습니다. “이 시편은 경건한 왕이 자신이 생활하며 지은 죄 때문에(5) 하나님께 징계로 다스림을 받은(26) 시기에 널리 퍼진 음모에 시달리면서 드리는 기도이다.”(NI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2016)).
우리는 이 시편을 두 차례에 나누어 상고할텐데, 오늘은 18절까지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보면, 탄식과 간구가 섞여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는 다윗이 처한 처지에 대한 깊은 탄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간구의 성격도 들어있습니다. 5절은 삽입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내용이고, 6-12절에는 다시 탄식이 이어지고 13-18절은 간구입니다.


2. 다윗이 처한 곤경 (1-4, 14-15; 히 5:7-10; 12:2-4)
먼저 다윗이 자신이 처한 곤경을 탄식으로 표현하는 1-4절을 보겠습니다. 1,2절에서 다윗의 곤경은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들어왔다’는 말은, 물이 목까지 차서 목숨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말은 깊은 웅덩이에 빠져 도무지 발을 디딜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깊은 물, 큰 물’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허공에 뜬 것처럼 허우적거리는데, 물이 차올라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용이 여자를 없애려고 입에서 물을 강같이 토하여 냈다는 말씀에서 보았듯이(계 12:15), 여기서도 ‘물, 깊은 물, 큰 물’은 그런 부정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14-15절은, 이 물이 결국 다윗을 이유 없이 공격하고 비난하는 원수들, 다윗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69:14–15).”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고, 다윗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그 곤경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없고, 인간이 살다 보면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곤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절은 다윗의 곤경을 좀 더 자세히 보게 합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편 69:3).”
다윗이 처한 어려움은 신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곤경이 더해집니다. 다윗은 피곤하고 목이 마르고, 눈이 쇠하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부르짖음 때문이고 하나님을 바라서 입니다. 이 말은 자기의 기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당연히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이 자신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왔다면, 다윗은 피곤하고 목마르고 눈이 쇠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는 일상적 어려움에 추가되는 곤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할 수 없는 어려움일 때도 있지만, 기도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무 변화도 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추가되는 곤경입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이런 영적 곤경은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에 추가되는 어려움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을 때,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셨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브리서 5:7–10).”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편 69편과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는,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흘려 들으시거나 헛되게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곤경에서 주님을 바라보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2–4).”
이제 4절에서 다윗이 처한 곤경이 무엇인지 좀 더 드러납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편 69:4).”
이 곤경은 ‘까닭없이’ 미워하는 자들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합니다.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다’는 말은 다윗이 억울한 소송에 휘말려 패소한 것과 같은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닭없이 미움을 받고 억울한 일을 겪은 것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예레미야 15:10).”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한 상황은 전적으로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전 그 저녁에, 이 구절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25).”
주님의 이 말씀은 본문 4절이 다윗의 경험을 통하여 주님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주님과 다윗과 예레미야에게만 일어났겠습니까? 오늘날의 한국교회도 동성애 이슈를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혐오집단,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같은 이슈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소송에 휘말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비슷한 상황 가운데서 부당하게 미움을 받고 멸시를 받고 손해와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겪었던 일이고, 주님께서 친히 경험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곤경이 신앙으로 인한 고난이고 박해의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시편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를 통해서, 만일 우리가 근거 없는 고소와 비난을 받게 된다면, 모든 상실과 환난,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리고 수치와 책망이라도 인내로써 감당하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자. 모든 의와 거룩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자신도 역겹도록 싫은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비슷한 시련을 만날 때 당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3. 복합적인 곤경 (5-6, 26, 엡 3:13; 마 11:5-6)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까닭없이 자기를 미워하고 부당하게 원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5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시편 69:5).”
여기서 우매함은 단순히 잘못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자람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25회 사용되는데, 시편에 2번,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잠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매함은 진리를 따르지 않는 진리에 대한 죄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옳다는 도덕적 거만함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우매함을 고백하고, 또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라고 토로합니다. 다윗은 앞에서, 원수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까닭없이, 자기가 그들에게 행한 잘못이 없이 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시편 26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지금 어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시편 69:26).”
다윗은 자신을 가리켜, ‘주께서 치신 자’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원수들이 공격하는 그 일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중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의 곤경 중 어디까지가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고 어디서부터가 연고 없이 미워하는 자들의 비난입니까? 곤경이 미묘하고도 복잡해서 경계선을 선명하게 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6절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편 69:6).”
이 기도를 하는 다윗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아주 단순한 사례로는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에베소서 3:13).”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갇혀있다는 사실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걸림이 될 것을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도가 감옥에 갇히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부끄럽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수치가 아니라 도리어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바른 말씀의 토대 위에서 견고하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공동체 안에는 어른도 있지만 청년도, 아이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신자들을 넘어지게 하기 쉬운 주제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고난의 신학을 정립할 만큼 고난에 대한 말씀이 넘쳐납니다.
한 번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냐고 여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이적과 기사들을 말씀하시고 나서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태복음 11:5–6).”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알고도 실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복된 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이 십자가를 믿는 자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믿음에 연약해져서 우리가 겪는 고난을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는 자리에 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염려는 바울의 염려를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곤경과 고난이 비록 직접적으로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으나, 좀 더 큰 그림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주의 백성 중에서 자기를 인하여, 자기가 받는 거짓 비방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주의 집을 위한 열성 때문에 받는 비난 (7-12; 렘 15:15; 욥 2:9; 막 6:3; 3:21; 2:17; 롬 15:3)
그런데 7-12절을 보면, 다윗이 겪는 곤경은 ‘주를 위한 비방’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또 드러납니다. 정말 복잡하지요? 1-2절에서는 그의 고난은 그냥 사람이니까 겪을 수 있는 보편적 고난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기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영적 곤경이 더해집니다. 4절은 그 곤경이 까닭없이 다윗을 미워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한 고난이었다고 말합니다. 5절은 이 곤경이 다윗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닐지라도, 다윗은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 7절은 하나를 더 보여줍니다. 다윗의 고난은 ‘주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고난에 대하여 가장 분명한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주를 대신하여 받는 고난이고, 신앙 때문에 받는 고난이며, 9절의 말을 빌리면, ‘주의 집을 위한 열성’ 때문이며, 주를 향한 비방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고백했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예레미야 15:15).”
이런 신앙적 고난을 겪는 성도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이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은 그들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이럴 때는 사랑하는 혈육 조차 우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이 깊어지자, 욥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으루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 그 고독감은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8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시편 69:8).”
복음서는 주님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고(막 6:3) 친척들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셨으며(막 3:21) 형제들의 오해도 받으셨다(요 7:2-5)고 증언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면서 청결하게 하는 일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바로 이 말씀을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한복음 2:17).” 9절 상반절에 대한 인용입니다.
모두 주님에게서 성취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향한 열심으로 행하신 일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하는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본문과 관련하여 다윗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주의 집을 향한 다윗의 열성이 얼마나 특심했는지는 잘 압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건축을 원했고 그것을 허락 받지 못하자,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죽기 전까지 성전 건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습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주님 자신을 향한 열정이고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구절의 하반절을 또 인용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5:3).”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이기적 동기로 일하지 않으시고 주의 집 곧 교회와 형제들을 위한 동기와 열심으로 섬기셨으니 우리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는 동기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어지는 10-12절은 자신의 영적 열심이 비웃음을 사고 조롱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시편 69:10–12).”
“꼭 너처럼 믿어야 하느냐?”고 비아냥대고, “쇼를 하느냐?”고 비난합니다. ‘성문에 앉은 자’는 사회의 유지와 노인 등 지도층을 가리킨다면, ‘독주에 취한 무리’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게 취급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비웃고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범죄한 일만 제외한다면, 주님께서 다 겪으신 곤경들입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 때문에 말입니다.


5. 하나님의 속성에 기댄 간구 (13-18)
13-18절에는 본격적인 간구가 나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했고, 3절에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암시했던 다윗은 이제 본격적으로 간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간구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생활에서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13절에서는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구합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속성입니다. 16절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라고 말하고 ‘주의 많은 긍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의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제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기도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3절에서 ‘나를 반기시는 때에’ 기도하겠다는 말은 지금은 응답을 하지 않으시니 기도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때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지금 기도합니다.”라는 말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우리는 오늘 시편 69편의 절반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이 처한 곤경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보았고, 이 곤경은 주님께서 그대로 겪으신 것이라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그렇다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그리고 이 곤경은 우리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발견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고난이 많습니다. 거기에 신자로서 우리는 기도가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하는 경험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다윗처럼 우매함이 많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지 않으시는 자녀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의 이유 없는 미움과 비난과 조롱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 자신을 위한 열심으로 인해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동기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교회 즉 형제들을 위하는 동기가 우리 삶의 중요한 동력이어야 합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은 결국 적극적 고난을 가져옵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그런 일이 겪고 계시다면, 오늘 이 본문은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고, 여러분은 이 시편으로 기도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이 모든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을 때, 우리가 주님과 깊은 연합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은 성도에게 수치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어느 때보다 깊어지고,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더 없는 친밀함을 경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받는 비방이나 고난을, 투옥되거나 매를 맞는 것과 같이 대단한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일상에서, 믿음 때문에 회사에서 외로움을 겪거나 승진의 어려움을 겪는 것,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일 수도 있고 믿음 때문에 나의 것을 적극적으로 연약한 형제들과 나누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난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겪는 일인가, 믿음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나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익숙해져 가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익한 질문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주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의 삶을 신앙의 관점에서 재고하고 조정하셔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곤경은 다윗은 겪은 것처럼 정말 복합적인 것이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 주신 권면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19–21).”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