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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9B). 주께서 아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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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9B). 주께서 아시나이다

시편 69:19-36, 히브리서 4:15-16, 이사야 53:3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10-21

말씀내용
시편 69편이 복합적 성격을 가지기는 했지만, 존 스택(John H. Stek)이 한 문장으로 이 시편을 잘 설명했다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다시 인용합니다. “이 시편은 경건한 왕이 자신이 생활하며 지은 죄 때문에(5) 하나님께 징계로 다스림을 받은(26) 시기에 널리 퍼진 음모에 시달리면서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는 앞에서 다윗이 한편 자신의 죄로 징계를 받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징계를 인하여 자신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원수들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징계의 성격이 있으나 저 원수들의 비난에 대해서 자신은 결백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신앙적 고통이 더해집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고난 속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게 되고, 그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자신의 환난이 완전히 해결되고 정리된 다음에 쓴 시라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이 시편 안에서는 그런 단서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 시편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다 해결된 뒤에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1. 성도의 위로 (19; 히 4:15-16)
다윗과 같이 안팎으로 고난을 겪게 될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이 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내 사정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이가 있는지를 찾게 되고, 그런 사람에게서 동정과 위로를 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을 때입니다. 한 사람도, 내 사정을 들어줄 사람 없고, 알아 줄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정말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성도가 이런 상황을 만날 때,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언제나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 이 고백 보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고백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나를 항하였던 얼굴을 돌린다고 하여도, 하나님만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것만 할 수 있다면, 그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넘치는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경험하는 이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9-21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다윗은 비방, 수치, 능욕을 겪고 있습니다(19). 비방은 마음을 상하게 하였고 근심이 충만하게 하였습니다(20). 그래서 다윗은 불쌍히 여겨줄 자를 바랐으나 그런 사람은 없었고 자기를 긍휼히 여겨줄 사람을 바랐으나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바라던 위로와 동정은 커녕, 쓸개를 주고 초를 마시게 하여 자기를 더욱 괴롭게 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자기를 아신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였습니다. 주께서 우리 사정을 아신다는 것은 사실 그저 바라보고 아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이 말씀에 근거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다윗은 지금 이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죽으신 일이 일어나기도 천 년 전에 말입니다.
이 시편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하는 것입니다.


2. 메시야 예언 (19-21; 사 53:3; 마 27:34, 48; 요 19:28-30)
우리는 이런 경험들이 다윗의 어떤 상황과 연결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다윗의 상황은 그리스도께 어떤 일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69편은 부인할 수 없는 메시야 시편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3).”
특별히 다윗에게 쓸개(담즙)와 초(식초)를 주었다는 21절은 주님의 십자가상에서 성취된 예언이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태복음 27:34, 48).” 이 두 구절에서 정확하게 21절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성취하려고 의도적으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28–30).”
죠지 혼(George Horne, 1730-1792)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끝자락에서 그분은 아무 위로자 없이, 그리고 아무 동행자 없이 홀로 버려지셨다. 이 모든 것이 그분에게 일어났다. 모든 쓰디씀과 신랄함들이 농축되어 그의 슬픔의 컵에 담겨졌다. 이것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라는 말씀에서, 비유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그분에게 일어났다.”(George Horne, Commentary on the Psalms (1771; repr., Audubon, NJ: Old Paths Publications, 1997), 287.; 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를 얻게 되는데, 메시야에 대한 원수들의 태도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윗에 대한 원수들의 공격이 아니라, 메시야에 대한 공격이라는 차원이 이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 특히 저주 기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저주 기도 (22-28; 눅 6:27-28; 마 5:44; 눅 23:34; 롬 12:19, 21; 11:9-10; 마 23:29, 33, 38; 계 16:1)
앞의 탄식에 이어 저주기도가 이어집니다. 22-28절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자기 때문에 주를 바라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고 주를 찾는 자가 욕을 당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 시작되는 저주기도는 신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원수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먼저 다윗은 그들에게서 평안한 삶을 빼앗아달라고 기도합니다. 22절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편 69:22).”
여기서 밥상은 아마 계약을 체결하고 공동식사로 계약을 비준하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런 계약이 그들의 올무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축복이 저주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그들의 건강을 빼앗아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시편 69:23).”
‘허리가 항상 떨리게’라는 표현은 허리가 부러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허리가 꺾인다는 것은 결정적인 건강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가 늘 그들에게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시편 69:24).”
넷째로 다윗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편 69:25).”
그들의 자손이 끊기고 가족들이 해체되어 사라짐으로 비통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해달라는 저주의 기도입니다.
다섯째로 다윗은 그들의 죄악이 점점 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속화시키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69:27).”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여지가 없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면을 받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은 결정타를 날립니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편 69:28).”
이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원수들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확정해주시길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의 기도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누가복음 6:27–28; 마 5:44 참조).”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바울 사도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9, 21).”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편의 저주 기도를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가장 먼저 이 저주 기도가 다윗 자신이 개인적 원수를 갚아달라고 탄원하는 성격의 기도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경험하는 원수들의 문제는 단지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한 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 곧 메시야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이 저주기도의 본문은 신약성경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먼저 22-23절이 로마서 11:9-10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로마서 11:9–10).”
또 주님께서 친히 25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태복음 23:38).”
위의 두 인용 본문은 모두 메시야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에수님께서는 심지어 그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친히 저주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29, 33).”
메시야에 대한 태도 여하가 이런 저주와 심판을 초래하게 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다윗의 저주기도를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읽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윌리엄 플러머는 “이것은 명백히 저주의 말이 아니라 예언의 언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주님은 자기 백성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어떤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16:1이 본문 24절의 인유라고 봅니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6:1).”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올 것이고 그 심판은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대로, 다윗은 이 저주 기도로써 자기가 복수하거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것을 맡기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12:19).
이렇게 이 저주 본문은 메시야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의 심판 여하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4. 죄인의 딜레마와 하나님의 응답 (21,26,29; 사 53:3, 5-6)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자리가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29절에서 자기는 ‘가난하고 슬프오니’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주께서 치신 자,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죄악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다윗 자신도 저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대로, 그것은 메시야의 고난이고 죽음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
여기에는 아주 역설적이게도, 다윗의 고난의 이야기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이야기가 겹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난하고 슬프다고 말합니다. 사실 진짜 슬픔의 사람은 주님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실 메시야를 ‘슬픔의 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사 53:3,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인의 자리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슬픔의 사람이 되어 죽으심으로써 저주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인생들의 구속을 이루신 일을 다윗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5. 찬송의 예물 (30-36, 6)
시편 69편은 비록 탄식으로 가득하지만 놀랍게도 그 결말은 승리의 선언과 찬송입니다. 제임스 보이스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에게 비극은 결코 마지막 단어가 아니고, 마지막 단어는 언제나 승리이고 찬양”인 것입니다. 이 마지막 본문(30-36)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 찬송은 다윗이 처한 곤경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찬송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구원과 승리를 확신하면서 내적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고 이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곤경과 환난 속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편 69:30–31).”
환난 속에서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다윗은 확신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가진 중에서 감사함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풍성한 예물이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비참하고 가난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동일한 감사함과 믿음으로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이 찬송의 예물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브리서 13:15).”
‘찬송의 제사’라고 할 때 제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최고의 예물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 예물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32절입니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시편 69:32).”
곤고한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이들이 “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송도 최고의 예물로 받으시는구나”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다른 곤고한 신자들이 다윗이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자기 연민에서 찬송으로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32-33절은 6절에서 다윗이 했던 염려와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주를 바라는 자들과 주를 찾는 자들이 환난 중에 있는 자신을 보고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할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도리어 자기를 보고 기뻐하며 그 마음이 소생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부에 처하든지 가난에 처하든지 우리 주변의 형제들로 하여금 기뻐하며 그 심령이 소생케 됨을 경험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끝으로 34-36절을 보지요.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시편 69:34–36).”
다윗은 천지와 모든 생물을 불러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탄식으로 시작한 이 시편은 이렇게 장엄한 찬송의 내용으로 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성도의 인생 여정에 환난과 탄식은 있을지라도 그 끝은 영광스러운 승리와 장엄한 찬송이 될 것입니다.


6. You know,
자, 말씀을 맺으면서, 다윗의 탄식이 찬송으로 변하게 되는 변곡점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물론 여러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9절 상반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이 내 사정을 아신다는 것은 성도의 위로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왔습니다. 어린이 소요리문답 11문은 이렇습니다: 11문. 여러분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답. 아니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우리를 보십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위로요, 다른 한편으로는 경고입니다. 모든 곤경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위로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으로 인하여 평생에 큰 위로를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히브리어나 영어의 어순으로 19절을 읽는다면, ‘당신이 아시나이다’로 시작합니다. 영어성경들은 거의 이 부분을 ‘You know’라고 번역했습니다. 팀 켈러는,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You know’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통이 되는 관계일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의식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친구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You know”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다 열거하지 않아도, “주님, 아시죠?”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비방과 수치와 능욕의 자리를 넘어 찬송의 자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다윗이 겪은 것과 같은 복잡하고 해석하기 쉽지 않은 환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이 모든 것을 극심하게 겪으신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You know.” “주님, 아시죠?”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찬송의 자리로 데려가실 뿐 아니라,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곤고한 형제들이 기뻐하게 하고 찬송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