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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1). 나이 들어가는 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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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1). 나이 들어가는 자의 기도

시편 71:1-24, 고린도후서 12:9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12-02

말씀내용
시편 71편의 제목은 ‘노년을 위한 기도’ 혹은 ‘나이들어가는 자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렉 키드너는 말합니다. “시인은 나이가 들었거나 들어가고 있는데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은 어떤 문제(trouble)를 안고 있다(7).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오랜 기억과 그의 삶을 새롭게 하는 힘에 대해 커져가는 희망을 확정한다.” 또 찰스 스펄전은 이 시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는 나이든 성도의 기도이다. 그는 믿음에 굳게 서서 오랫동안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원수들을 대항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 자신에게는 복을 내려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응답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여호와를 높이고 영화롭게 할 것을 약속한다.”
제가 시편 71편에 대한 데렉 키드너와 찰스 스펄전의 말을 소개한 이유는, 이 시편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핵심을 짚기가 쉽지 않기에, 이 두 분의 설명으로 여러분이 이 시편의 메시지를 대략적으로 이해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류폴드(H.C.Leupold)는 어떤 두 사람의 학자도 이 시편의 구조에 대해서 일치하는 견해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누가 썼는지 표제어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다윗이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전의 시들과 비슷한 내용과 어구들이 반복되고(22,31,35,38편들) 특히 1-3절은 31:1-3a와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역본인 70인경에는 [다윗의 시, 여호나답의 아들들과 처음으로 사로잡힌 자들이 부른 노래]라는 설명이 붙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호나답은 레갑의 아들로 북왕국에서 예후를 도와 바알 숭배자들의 척결을 도왔던 인물입니다. 이 후손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 않았으며 포도원도 가꾸지 않고 장막에 살면서 선조 여호나답의 명령과 훈계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로 유명합니다(렘 35:6-7; 왕하 10:15-27).


1. 세 종류의 시간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시편에는 세 종류의 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시인의 어린 시절이 언급됩니다. 5절에서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고 하고, 6절에서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라고 말하는데, 이 고백들은 모두 어린 시절, 즉 과거에 대한 회상입니다. 둘째로 지금 계속되고 있는 시간이 나옵니다. 3절에서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라고 한 것, 6절에서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고, 8절에서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14절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라고 말하고있고 15절에서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17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라고 하고, 24절에서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들은 어느 정도는 현재 시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시인은 자신의 노년의 시기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아마 시인이 거의 다다랐거나 곧 다다를 것이라고 느끼는 시기일텐데, 이 두 구절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9절과 18절입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편 71:9).” 그리고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18).”
시인은 자신이 늙어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의 삶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안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또한 이것은 미화되지 않은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모태에서 어린 시절을 거쳐 현재 그리고 노년이 깊어질 장래까지를 내다봅니다. 이 시편은 물론 늙어감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공감이 될 내용이겠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에 와 있다고 느끼든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고 우리 모두가 공감할 주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돌아볼 과거가 있고 진행되고 있는 현재가 있으며 내다볼 장래의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나이들어간다는 것
여러분에게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시니어센터의 어르신들에게 [인생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강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저는 여러 책을 보고 강의를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가을이 온다는 강의 제목을 깊이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시편 71편의 말씀을 설교하는 마음은 그때와는 많이 다르지 않나 싶고 ‘약간의’ 편안함 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현재 만 96세이신데, 그가 22년 전에 『나이드는 것의 미덕』(The Virtues of Aging)이란 책을 썼습니다. 제가 당시 그 강의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 연세가 있으신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나이드는 것의 미덕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발견하셨습니까?
현대 사회는 나이드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만 간주하고, 모든 것의 초점이 젊음에만 놓여있는 사회입니다. 미국의 데렉 토머스 목사가 18살된 학생에게 “너는 늙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었답니다. 그 학생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늙기 전에 죽기를 바랄 뿐이지요.” 이 학생의 대답은 늙어가는 것에 대한 현대 사회의 이해를 잘 대변해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늙어간다는 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총명함과 즐거움을 상실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대의 관점과 흐름은 매우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심지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반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우리 노래 중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가사도 정확하게 이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3. 나이들어가는 시인의 두려움(9,16, 11-12, 18; 삼상 17:34-37)
사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시인 자신이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시인의 두려움은 나이들어감에 대한 생각이나 관념적, 이성적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9절을 봅시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편 71:9).”
시인의 두려움이 느껴지십니까? 그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인생의 가을이 오고 나이듬이나 늙어감이 자신의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그는 이런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 날,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때려눕혔던 사람이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입니다. 그는 양을 칠 때에 곰과 사자와도 싸웠다고 했습니다(삼상 17:34-37).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백전백승을 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가 이제 늙어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자신의 늙어감을 느끼는 다윗의 마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쓸모없어진다는 생각일 것이라고 어떤 학자들은 말합니다. 여러분도 다윗의 이 기도에서 그런 마음을 느끼시는지요?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말라는 기도,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시라는 기도는, 자신이 전과 같이 유능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쓸모있음이라는 것이 과연 젊은 날의 체력과 지력, 용기와 민첩함에 비례하는 것입니까? 로버트 클린턴이 하나님이 쓰셨던 많은 사람들을 연구하고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Finishing Well! 우리 말로 유종의 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맺음을 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젊은 날 한 때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일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끝맺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는 길이어야 합니다. 젊을 때 분주하게 다니면서 주님을 섬겼다면, 늙어서는 존재감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쓰임새와 영향력이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나이들수록, 늙어갈수록 더 쓸모 있고 유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늙어감이란 현실적 두려움이었고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의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21–22).”
두번째로 다윗이 나이들어감에 관하여 느낀 두려움은 쇠약해지는 육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9절 하반절에서 ‘내 힘이 쇠약할 때에’라고 말합니다. 나이들어가는 것, 늙어가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감리교 전도자였던 존 웨슬리는 86세 생일에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1789년 6월 28일). “오늘은 86세가 되는 날이다. 이제 나는 늙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1)내 시력은 아주 밝은 불빛이 없는 한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없도록 쇠퇴하였고 2)내 힘은 너무나 천천히 걸어야 할만큼 노쇠했으며 3)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나의 기억력은 그것들을 다시 불러낼 수 없을만큼 노후되었다. 내일이 되면 내 몸이 내 정신을 짓누르고 이해력이 떨여져서 완고해지는 것은 아닐까, 몸의 질병들이 많아져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오 주 나의 하나님, 제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공감이 되십니까?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위대한 복음전도자의 일기입니다. 그가 알미니안이라서 이런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육신이 쇠약해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자신감을 빼앗아갑니다. 이 시편의 기도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두려움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시편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가중되는 늙어감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갑니다. 먼저 주님께로 가기도 하고, 또 전과 같이 쉽게 만날 수가 없습니다. 11절을 보지요.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시편 71:11).”
원수들이 하는 말입니다. 늙어가는 다윗의 주변에는 젊은 날의 원수들이 여전합니다. 마치 성도의 인생 주변에서 사탄이 떠나지 않고 배회하며 삼키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은 다윗의 ‘영혼을 엿보는 자들’입니다(10). 그들은 다윗을 향해서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하면서, 이제는 그를 따라잡으면 잡을 수 있고 그를 건져주실 하나님도, 측근들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늙어가는 다윗이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2절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편 71:12).”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떠나갔고 멀어졌지만, 하나님만은 나를 멀리 하지 말아 주시기를 구하는 다윗의 외로운 심정이 절절이 묻어나는 간구입니다.
18절 상반절의 기도도 9절의 기도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시 71:18a).”
다윗이 이런 심정을 토로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실마리가 있는데, 7절입니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시편 71:7).”
나이가 들면, 편안한 환경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이상한 징조’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아보입니다. 새번역성경이 “나는 많은 사람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으나”라고 번역한 것은 잘된 번역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다윗의 어떤 문제를 보고서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셨다고 사람들이 보았다고 말하는 11절과도 통하는 말씀입니다. 죠지 혼(George Horne)은 다윗와 예수님을 ‘이상한 징조’라는 말로 연결을 시킵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밖 감람산으로 눈물 흘리며 오르는 다윗을 본 사람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보리로 이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들은 다윗이나 예수님이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견고한 피난처가 되셨습니다(7b).


4. 과거의 은혜를 돌아봄 (5-6, 7-8, 17, 24)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의 은혜를 돌아봅니다. 간구와 간구들 사이 사이에서 다윗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편 71:5).”
다윗은 나이가 들어서 주님을 찾는게 아닙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과 동행해왔던 것입니다.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외로워지자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는 또 6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71:6).”
그는 더 멀리 모태까지 갑니다. 거기서도 주를 의지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번역은 ‘내가 의지했다’이지만, 그 의미는 KJV가 번역했듯이 “주께서 모태에서부터 나를 붙드셨사오며”라고 수동태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앨런 로스도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라는 말씀과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은 모태에서 다윗을 붙잡아주셨고 태어날 때부터 돌보아 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어려서부터 그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제 17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시편 71:17).”
그 하나님은 어린 시절부터 다윗을 교훈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평생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른 제자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가 직면했던 경험 속에서 주를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필연적 결과는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하는 고백입니다. 평생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회중에게 정기적으로 선포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행하셨고 행하시는 큰 일들을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16절에서는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과 ‘주의 공의’를, 17절에서는 ‘주의 기이한 일들’을, 18절에서는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을, 그리고 24절에서 ‘주의 의’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윗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자신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반드시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며 그로써 당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5. 장래의 은혜 (9, 11,15-18, 19-20; 고후 12:9)
이 시편에는 다윗의 확신이 많이 피력됩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지만, 이 기도는 정말 확신에 찬 기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말하지만(11)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라 확신하는 것입니다(9,18).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회복하시고(20) 자신을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실 것을 확신합니다(19-20). 우리는 여기서 늙어가는 한 신자가 언약의 하나님이 자신의 평생에 보이셨던 성실하심에 비추어 장래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윗이 가졌던 장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보겠습니다. 장래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에 대한 다윗의 확신은 찬송과 선포에 대한 각오로 표현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 신실한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어 합니다. 먼저 찬양을 부르겠다는 다윗의 각오가 반복됩니다.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6).”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8).”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14).”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23).”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24).”
두번째로는 선포하겠다는 각오를 다윗은 밝힙니다. 15절에서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그리고 16절에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17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8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18).”
하반절에서 다윗은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을 전한다고 말하는데,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손들의 세대가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를 그는 바랍니다. 젊은 세대는 자기 힘과 자기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늙어가면서 ‘내 힘이 쇠약할 때’를 염려했습니다(9). 그러나 이제 다윗은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을 알았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 다윗의 바람은 하나님의 의롭고 놀랍고 성실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은 다윗이 노년에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노쇠할지라도,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노쇠할지라도’ 라고 말하기 보다, ‘노쇠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후대에게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노년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 속에서 드리기 시작한 기도에서 사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6. 경건한 어른, 그리고 그리스도
다윗처럼 나이들어가는 어른이 계시는 회중은 복된 회중입니다. 본문은 성숙한 신자들은 인생의 노년이나 어느 한 때가 아니라, 일평생 전생애에 걸쳐 주님을 지속적으로 신뢰하고 위기 속에서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성숙해진 믿음을 가진 어른의 존재는 공동체에게 안정감을 줄 것입니다. 이런 어른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신뢰하는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시편에서 다윗과 그리스도를 놀랍게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합니다. 인용입니다. “이 이름 모를 옛 언약 신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자기 백성을 이끌어 과거를 돌아보며 찬양하게 하는 더 위대한 신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청년은 요절했으나 젊었는데도 늙어감이 무엇인지 알았고 자신 앞에 무엇이 놓여있든지 간에, 심한 고난이 숱하게 닥치고 ‘땅 깊은 곳’에 내려가더라도 (20) 마리아의 뱃속에서부터 자신에게 성실하셨던 아버지 하나님이 끝까지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리라고 확신했다. 그분은 우리를 포함해 다음 세대에게 이 성실하심을 선포하셨다. 우리도 우리의 늙어감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성실하심을 선포할 때 예수님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주님이 필요하고, 그 주님을 닮은 어른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런 어른들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