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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3). 무엇이 진정한 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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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3). 무엇이 진정한 복인가

시편 73:1-28, 고린도후서 4:17-18, 요한일서 2:17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12-30

말씀내용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뭔가?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수 있는건가? 어떻게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셨습니까? 혹은 여러분 자신의 삶과 주변의 불신자들의 삶을 비교하면서,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의문을 품어 보셨습니까? 성경의 경건한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고 믿음의 위기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종종 이런 의문에 사로잡히는 우리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곤 합니다. 욥이 그랬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랬으며 하박국 선지자도 이런 문제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 제3권에서 처음 만나는 시편 73편이 바로 이런 문제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제1권과 제2권에서 우리는 주로 다윗의 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3권(73-89편)에는 총 열 일곱 편 중에서 다윗의 시는 86편 하나 밖에 없습니다. 73-83편이 모두 아삽의 시이고, 시편 50편을 더하면 시편 전체에서 아삽의 시는 모두 12개가 있습니다. 이외 네 편(84,85,87,88)이 고라 자손의 시이고, 89편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에단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73편의 저자로 소개되는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다윗이 성전의 음악 리더로 임명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역대상 25:1).”
시편 73편은 신정론의 주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당하고 옳으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신정론입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정말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악을 벌하고 선을 보상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가 보상받고 악이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을 충분히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이 시편을 사랑한 것은, 이 시편이 가지고 있는 너무나 솔직하고 공감적인 고백들 때문일 것입니다.


1. 내리막길—시험에 들었다(1-14)
이 시편은 하나의 신조 혹은 신앙고백으로 시작합니다. 1절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편 73:1).”
우리도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으로 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문장들을 함께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시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참으로’라는 말은 고백의 확고하고 확실함을 강조합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시인의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결한 자기 백성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결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말이라기 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편 73:2).” 그는 자신의 믿음에서 안정감과 확실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의문이 생기면서 시험에 든 것입니다. 신앙의 내리막길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믿음을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페로운(J.J.Stewart Perowne)은 “불신앙은 의심하지 않는다. 믿음이 의심한다”고 이 시인의 상태를 잘 표현했습니다. 시인이 시험에 든 이유는 3절이 설명합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편 73:3).”
시인은 뭔가를 보았는데 그가 본 것은 형통한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습니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그냥 스쳐지나가며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 생각했고 관찰했고 질문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시인은 그들에게서 형통을 보았습니다. 형통은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의 번역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평안과 안녕의 상태를 말합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악인과 오만한 자들은 샬롬을 누릴 수 없어야 하는데, 시인은 그들에게서 샬롬을 보았고, 그것이 시인의 마음에 질투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4-12절은 시인이 본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 시인은 그들이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한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4).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겪고 살아가는 고난이 없었고,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재앙도 없었습니다(5). 한 마디로, 그들은 문제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4절에서 ‘고통’은 ‘족쇄’라는 뜻인데, 보토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죽음이라는 족쇄에 묶여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힘이 강건하며’라는 말은 ‘그들의 배는 기름지며’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배는 몸 전체, 육체적 본질과 힘을 가리키는 제유법입니다. 그리고 기름지다는 말에서 ‘기름(지방)’은 융성함과 건강함의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그들은 건강하고 멋진 몸을 가졌고 늙어서도 그러합니다.
5절에는 사람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라고 할 때, 사람은 에노쉬(אֱנוֹשׁ)인데, 이는 부서지기 쉬운 보통 사람들, 평범하고 약한 인간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게 고난이 없다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노역이나 노동으로 인한 수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할 때 사람은 아담(אָדָם)인데 일반적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 재앙이 없다는 것은, 재난이나 사고 혹은 치명적인 질병 같은 것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무자비하게 교만합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시편 73:6).” 강포(폭력)는 교만의 열매입니다. 이런 강포는 모든 갑질을 포함하여 사회적 불의와 압제 등을 가리킵니다. 강포가 옷이라는 말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 특징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다 얻어내고야 맙니다. 7절을 보지요.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시편 73: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는 그들의 눈이 살쪄서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그들의 눈은 돈독이 올라서 크게 튀어나와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욕망하는 것 이상을 얻어 누리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8-9절은 그들의 교만한 말을 지적합니다. 먼저 8절입니다.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시편 73:8).” 그들의 모욕하는 언어는 악하고 고통스럽고 파괴적입니다.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라는 말은 위에서 압력을 행사하면서 협박을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9절입니다.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편 73:9).” 그들은 초인적 수준으로 자신들을 높이는데, 그들의 교만이 끝이 없어서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에 이르렀고, 온갖 악한 말과 교만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정말 시인을 화나게 한 것은 이렇게 오만방자하고 폭력적인 악인들이 영향력 마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시편 73:10).” 사람들은 그들이 누리는 번영을 보고서 그들에게로 몰려듭니다. 자기들도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악 조차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라는 말은 그들의 번영에 편승하여 떡고물을 먹으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 악에 참여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11)”하며 가벼운 입술을 놀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그들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시편 73:12).”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며, 심판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악인들은 잘만 산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불어난다는 것은 힘과 사치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시험에 든 이유였습니다. 시험에 든 시인이 고백하는 말의 절정은 13-14절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편 73:13–14).” 무서운 말이 아닙니까? “믿어봤자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헌신적으로 잘 믿어보려고 했는데, 아무 소용 없더라”는 말입니다. 자기 신앙, 그리고 주께 대한 헌신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고백을 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슬픈 기억이지요.


2. 생각하라, 형제와 언약을! (15-16; 말 2:10-16)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끝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제어한 것은 교회 즉 형제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 내가 이런 생각을 가졌으니 솔직하게 내 마음은 이렇다고 형제들에게 말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시편 73:15).”
시인은 악인들과 그들을 따라가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는 것은 형제들을 배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의 아들들의 세대’는 언약의 자손, 교회, 즉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자기가 경솔하게 악인들 처럼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형제들에게 ‘악행’을 하는 일임을 생각했습니다. ‘악행’은 거짓을 행함으로써 언약을 깨뜨리는 배신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언약으로 취한 아내를 버리는 이혼행위를 비난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말 2:10-16).
오해하지 마십시오. 정직해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인이 1-14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정직하게 의문을 품을 수 있고, 정직하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과 경험 사이의 간극에 서는 일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겪은 일입니다. 이것은 16절의 고백처럼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말했습니다. 정직한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나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경솔하게 이것이 나의 정직함과 솔직함이라고 말하면서 형제들 앞에서 떠벌리는 일에는 신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형제들에게 악행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제들을 생각했고, 언약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어떤 신앙의 위기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매우 중요한 행동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언약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적인 솔직함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감과 충성심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들었던 시인이 내리막길에서 벗어나는 첫번재 단계였습니다.


3. 예배하라, 하나님을!(17)
두번째로 시인이 하게 된 것은, 성소에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편 73:17).”
원문에는 ‘성소들’에 들어갔다고 복수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의 복수에는 위대함을 강조하는 용법이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성소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 식으로 ‘예배당에 들어갔다’는 문자적 의미라기 보다, 시인이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하며(16)’ 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종말’을 깨달은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거나 선포된 말씀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경건한 사람은 성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보고 그분의 힘과 영광을 목격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11절에 언급된 것은 악인의 말에서 언급된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영적 지각이 열립니다. 캠벨 몰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밀한 처소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대로 우리도 사물과 사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영적 지각이 열리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영적 지각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경험입니다. 이성적으로 납득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할 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딱 떨어지는 답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영광을 뵈옵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영적 지각이 열려 자신의 믿음을 흔들어놓던 문제의 해법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17절은 이 시편의 반전 포인트입니다.


4. 주목하라, 악인의 종말을, 최후 심판을!(17b-20; 1:4,5)
시인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인의 종말이었습니다. 18절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시편 73:18).”
시인은 2절에서 자신의 걸음이 미끄러질뻔했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그들이 미끄러운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곧 파멸에 던져질 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주목하는 것은 종말, 악인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을 그날입니다. 그날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시 1:5). 19절에서 시인은 그들의 파멸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그들은 ‘놀랄 정도로’ 전멸하였다고 말합니다. ‘놀랄 정도’라는 말은 ‘두려움 가운데’라는 뜻으로, 그들에게 남는 것은 오직 두려움 뿐이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봅시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편 73:20).”
악인의 운명은 마치 사람이 깬 후에 꿈을 무시하듯이, 꿈 같이 허무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그들은 결국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시 1:4). 시인은 왜 시험에 들었습니까? 악인의 현재만을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왜 저들은 건강하지? 왜 저들은 강성하지? 왜 저들은 아무 문제도 없이 살아가는거지?” 하지만 이제 시인은 그들의 결국, 그들의 종말을 주목합니다. 최후의 심판을 주목합니다. 그러자 그의 신앙은 내리막길을 벗어나 오르막길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5. 회개하라(21-22)
그러나 신앙의 내리막길에서 오르막길로 접어드는 일은 단순한 깨달음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21-22절입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시편 73:21–22).”
‘산란하며’라는 말은 쓰다, 쓰디 쓴 경험을 일컫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되자 마음이 썼고 양심이 찔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우매 무지함, 그 어리석음이 하나님 앞에서 짐승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회개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를 그는 가감없이 인정합니다. 그는 어리석은 짐승처럼 반응한 것입니다. 자기가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었지만 표면상의 진리를 가지고 살아왔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마트면, 시인은 “믿어봤자 소용없어!”라고 말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는 짐승 같았다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회개는 신앙의 내리막길에서 오르막길로 오르는 터닝포인트입니다.


6. 다시 고백하라(23-26)
회개라는 터닝포인트를 지나자, 시인의 입술에서는 단순히 신앙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신조가 아니라, 가슴의 고백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신정론으로 시작했지만, 절절한 신앙의 고백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23-28절에 이르는 절절한 고백이 이 시편의 백미입니다. 23-24절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를 아우르는 시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편 73:23–24).”
먼저 시인은 자신의 신앙이 빛나는 순간 뿐 아니라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라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언제나 동일합니다.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는 완료시제 동사로 과거를 가리켜 하는 고백입니다. 그 다음에 시인은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진행중인 동작을 의미하는 미완료시제입니다. 시험에 든 시인은 현재 주의 교훈으로 인도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장래를 가리키는 미완료시제입니다. ‘후에는’이라는 말이 과연 내세를 가리키는가 라는 점에서 학자들은 논난을 벌이지만,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볼 때 그리고 25절의 고백에서 볼 때, 이것이 내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것을 확신합니다. 시인이 다시 믿음의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25-26절은 아마 73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본문일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편 73:25–26).”
영적 지각이 열리자,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땅에서 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입으로 외는 고백이 아니라, 시인의 가슴에서 나오는 절절한 고백이 아닙니까? 자신의 육체와 마음이 악인들처럼 건강하고 담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인의 마음이 든든한 것은 하나님이 마음의 반석과 영원한 분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분깃은 영원한 소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만 재물을 쌓고 살아가는 자들을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분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7. 교훈과 적용: 무엇이 진정한 복인가 (27-28; 요일 2:17; 고전 7:31b; 고후 4:17-18)
시인은 이제 성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통한 교훈을 주려고 합니다. 27-28절입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 73:27–28).”
여기서 시인은 두 종류의 삶 또는 사람을 대조합니다. 한편에는 주를 멀리하는 자,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 주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복된 삶을 사는 자입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선언합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다. 나는 살아서 재물을 많이 쌓고 건강하고 문제거리 없이 살다가 죽는 게 복이라고 잠깐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의 결론입니다.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라는 신조로 시작했습니다. 여기 ‘선’이라는 말과 28절의 ‘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טוֹב)입니다. 시인은 결국 무엇이 참된 선이고(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무엇이 참된 복인가 하는 주제를 이 시편에서 다룬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복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사는 삶이 선이고 복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시험에 들었습니까? 악인의 현재를 주목했기 때문에 질투하게 된 것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1-14절의 문단의 제목을 ‘질투의 마름병/질투라는 이름의 말라주는 병(blight of envy)’이라고 붙였습니다. 어떻게 시인은 그 마름병에서 고침을 받게 됩니까? 어떻게 그 내리막길에서 빠져나오게 됩니까? 그는 형제들을 생각했고 언약을 생각했습니다. 형제들 앞에서 언약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눈을 악인들에게서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짐승 같이 우매 무지했던 영적 지각이 열렸습니다. 악인들의 화려한 현재가 아니라 그들의 비참하고 허무한 종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참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입술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가슴 절절한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것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1서 2:17).”고 했고 사도 바울도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린도전서 7:31b).”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7–18).”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악인들의 형통을 보면서 우리도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 시편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내리막길에서 돌이켜 다시 믿음의 오르막길을 지나 그 정상을 향하여 가십시오. 시인과 함께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편 73:25–26).”라고 고백하는 참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하루를 지내고 나면 2021년 새해를 맞게 됩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이 사람을 보고 낙심하고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열려진 영적 지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